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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인물

우리나라위인 : 이순신 장군 업적 정리 (연도별 나이별 사건요약)

by 혜봉이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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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1545년에 태어나 1598년에 숨을 거두었던 이순신은 조선 선조 때 거북선을 만들고

뛰어난 작전으로 왜군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낸 장군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순신 장군에 업적과 그의 일대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순신의 영정

 

이순신의 삶

1545년 4월 28일 ( 1세 ) : 지금의 서울시 인현동인 한성 마르내골에서 태어남.

 

1566년 ( 22세 ) : 무예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함.

 

1572년 8월 ( 28세 ) : 훈련원 별과 시험을 보았으나, 말에서 떨어져 불합격함.

 

1576년 2월 ( 32세 ) : 3년마다 정기적으로 보는 무과 시험의 병과에 합격함.

 

1579년 2월 ( 35세 ) : 훈련원 봉사(종8품)가 됨. 충청 병사의 군관이 됨.

1579년 10월 ( 35세 ) : 충청 병사의 군관이 됨.

 

1580년 6월 ( 36세 )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인 발포의 수군만호(종4품)가 됨.

 

1582년 1월 ( 38세 ) : 군기경차관 서익의 거짓보고로 수군만호의 직책에서 해임됨.

1582년 5월 ( 38세 ) : 다시 복직되어 훈련원 봉사가 됨.

 

1583년 7월 ( 39세 )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의 군관이 됨.

1583년 11월 ( 39세 ) :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함

1583년 11월 15일 ( 39세 ) : 아버지가 돌아가심.

 

1586년 ( 42세 ) : 궁중에서 말에 관한 업무를 보는 관청인 사복시의 주부가 됨. 16일 뒤에 유성룡의 천거로 함경도 조산보만호에 오름

 

1587년 8월 ( 43세 ) : 녹둔도의 둔전관을 맡음. 여진족을 무찔렀으나, 북병사 이일이 책임을 미루어 억울하게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함.

 

1587년 2월 ( 45세 ) : 전라 감사 이광의 군관이 됨.

1587년 12월 ( 45세 ): 정읍 현감(종6품)이 됨.

 

1591년 2월 13일 ( 47세 ): 전라 좌수사가 됨.

 

1592년 4월 12일 ( 48세 ): 거북선을 완성함


거북선은 이순신이 최초로 만든 게 아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북선을 처음 만든 사람이 이순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순신은 예전부터 설계도로 전해 내려오는 거북선을 더욱 튼튼하게 발전시켰을 뿐 거북선을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북선은 조선 제3대 임금인 태종 때 처음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때에도 거북선은 왜군의 배와 싸워 크게 승리했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이 거북선을 많이 만들어 왜군과의 전장에서 이기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거북선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 때 실제 책임자는 나대용이었습니다.
나대용은 어려서는 학문을 공부했지만 20세부터 무예를 닦으며 28세 때 무예에 급제했으나 벼슬은 계속 낮은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왜군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 때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했다는 말을 들어 여수로 이순신을 찾아갔습니다. 나대용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창선'이라는 새 전투함을 만들었으며 그 뒤에는 '해추'라는 쾌속선 종류의 배도 만들었습니다. 나대용이 없었다면 거북선은 다시 모습을 보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기록에는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나와있지않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쓴 기록을 보면 철갑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83년 영국 해군 기록에서는 거북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전함은 쇠판자로 배 몸뚱이를 싸서 그때 일본의 나무 병선을 깨뜨렸던 것이니, 세계에서 가장 오랜 철갑선은 실로 조선 사람이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다"

또한 일본의 역사 자료에서도 거북선에 대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큰 배들 중 거북선 3척이 쇠로 장식되어있다. 조선 배는 쇠로 장식한 것이 있어 우리 총탄이 그것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거북선의 앞부분은 거북의 머리 모양(길이 1.3m, 넓이 91cm)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으로 연기를 토하여 적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좌우 갑판 아래에는 방이 각각 12칸이 있었으며 2칸은 철물칸, 3칸은 대포, 활, 창 및 검 보관칸, 7칸은 군사들의 쉼터였습니다. 왼쪽 갑판의 방 1칸은 지금의 장교에 해당하는 지휘관의 방이고 오른쪽 갑판의 방 1칸은 장령들이 머물렀습니다.

당시 이순신이 몇 척의 거북선을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은 남아있습니다.
"전라 죄수사 이순신이 장사 100여 명을 뽑아 3척의 거북선에 태워 적진 속으로 드나들며 날 듯이 빨리 다니므로 적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를 못했다"

이것을 보면 3척의 거북선이 있던 것은 확실하며 거북선에는 활 쏘는 군사와 노 젓는 군사를 합쳐 125명~13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북선에는 천자 총통, 지자 총통, 현자 총통, 황자 총통으로 대포를 쏘았습니다.

황자 총통

이 이름은 천(天), 지(地), 현(玄), 황(黃) 대보의 구경과 중량 등의 크기에 따라 천자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마도 거북선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에서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1592년 4월 13일 ( 48세 ) : 임진왜란이 일어남.


임진왜란의 시작

바다빛이 저녁노을로 물들어갈때즘 먼바다에서 왜군의 전함이 수평선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부산성 망루에서 이 모습을 본 병사가 한참 뒤이어 왜군의 전함이란 것을 알았지만 왜군의 전함은 곧바로 부산 앞바다에 이르로 부산성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부산 진지성


왜군의 막상한 군사력으로 결국 왜군들은 부산성을 손에 넣고 다대포까지 나아갔습니다.
4월 15일에는 동래성까지 갔으며 송상현을 비롯하여 수천 명이 전사했고 수백 명의 군사가 왜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왜근은 계속해서 부대를 나누어 한성으로 진격했으며 제1진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대장으로, 제2진은 가토 기요마사를 대장으로, 제3진은 구로타 나카마사를 대장으로 하여 한성으로 나아갔습니다.

조정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가 4월 17일에야 왜군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장수들은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사들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사용하는 왜군에 맞설 만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조총

그 와중에 왜군 전함이 거제도에 이르자 귀중한 전함 100여 척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순신은 허둥대거나 서둘러 움직이지 않고 적의 정세를 알아보며 전라 좌수영의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열었습니다.
여러 장수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나가서 왜군과 싸워 죽는 것이다. 감히 반대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이순신은 왜근을 무찌르겠다고 임금에게 편지를 보낸 후 1592년 5월 1일 전라 좌수영의 군사들을 여수 앞바다에 모두 모이게 하여 한마음으로 뭉치게 하였습니다.

5월 4일 새벽 어두운 바다를 이순신의 거느린 함대 80여 척의 배가 나아갔지만 실제 전투를 할 수 있는 배는 24척 뿐이었습니다. 왜군의 배 500여 척에 맞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592년 5월 7일 ( 48세 ) : 옥포 · 합포 해전에서 왜선 30여 척을 물리치고 가선대부에 오름.


우리 대포의 위력

가덕도 근처에 왜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옥포만으로 나아갔으며 이순신의 명령에 군사들은 대포를 조준했습니다.
옥포만에 왜군의 배가 30여척 머무르고 있었고 우리 전함을 보고는 왜군들이 도망치려 했으나 우리 군사들이 쏜 대포는 그보다 빨랐습니다.

현자총통

천자포, 지자포 등 우리 대포의 위력에 왜군의 배는 산산이 부서졌고 이 전투에서 왜군의 배 26척을 부수고, 다음 날 통영 앞바다에서 11척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순신은 첫 번째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30척도 안 되는 함대를 이끌고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92년 5월 8일 ( 48세 ) : 적진포 해전, 왜선 13척을 물리침.

1592년 5월 29일 ( 48세 ) : 사천 해전, 거북선을 처음 이끌고 나가 왜선 13척을 무찌름. 왼쪽 어깨에 총알을 맞음.

1592년 6월 2일 ( 48세 ) : 당포 해전, 왜선 20여 척을 부숨.

1592년 6월 5일 ( 48세 ) : 당항포 해전, 왜선 100여 척을 부숨.

1592년 6월 7일 ( 48세 ) : 율포 해전.

1592년 7월 8일 ( 48세 ) : 한산도 대첩, 왜선 73척을 부숨.


한산도 대첩에서 사용한 [학익진 전법]

학익진 전법

한산도 대척에서 사용한 전법으로, 거북선을 중심으로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진을 쳐 적을 포위하듯 감싸 공격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수군이 크게 승리했던 한산도 대첩에서는 왜군 전함 73척 가능데 12척을 빼앗고 47척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역시나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바로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었습니다.


1592년 7월 10일 ( 48세 ) : 안골포 해전, 왜선 60여 척을 부숨.

1592년 9월 1일 ( 48세 ) : 부산포 해전, 왜선 100여 척을 부숨.

 

1593년 2월 ( 49세 ) : 웅포 해전.

1593년 7월 15일 ( 49세 ) : 본영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김.

1593년 8월 1일 ( 49세 ) :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됨.

 

1594년 3월 4일 ( 50세 ) : 당항포 해전.

1594년 9월 29일 ( 50세 ) : 장문포에 있는 왜군을 곽재우, 김덕령 등과 육지와 바다에서 공격함.

 

1597년 2월 26일 ( 53세 ) : 한성으로 잡혀 감(3차).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바다에서는 별다른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군들이 이순신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면서 아예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앞으로 닥쳐올 큰 해전에 대비해 진용을 튼튼히 갖추면서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이 왜군에게는 이순신이 가장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에 음모를 꾸며 이순신을 몰아내자고 했습니다.

1597년 1월 11일 고니시는 대마도 출신의 첩자 가나메 도키스라를 경상 우병사인 김응서에게 보내 거짓 밀서를 전달했습니다. 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군의 장수 고니시와 가토의 사이가 나쁩니다. 가토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올 때 이순신을 시켜 죽여주십시오."

조정에서는 이 말을 곧이 믿고 가토를 공격하라고 이순신에게 명령했지만 이순신은 적의 간사한 꾀라며 명령에 가볍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가토는 이미 부산에 도착해 있었고 그런데도 이순신은 가토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선조는 이순신을 해임하고 이순신이 태만하여 잡을 수 있는 적을 놓아주었다고 벼슬을 빼앗고 한성으로 소환하여 죄인이 되어 잡혀갔습니다.


1597년 4월 1일 ( 53세 ) : 감옥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의 진중에서 백의종군함.

1597년 4월 13일 ( 53세 ) : 어머니가 돌아가심.

1597년 8월 3일 ( 53세 ) : 통제사로 다시 임명한다는 임금의 교서를 받음.

1597년 9월 16일 ( 53세 ) : 명량 대첩.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명량대첩]

해진도

명량은 오늘날 진도대교가 있는 곳으로 물살이 매우 빨라 예로부터 빠른물살이 흘러가는 소리가 울음소리 같다고 하여 '우는 바다'라는 뜻의 '명량' 혹은 '울돌목'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15일 전함 12척을 거느리고 울돌목으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해남군 면대면인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긴 후 장수들을 불러 모아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병법에 말하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 사람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에 따라 작은 일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고 수많은 왜군의 배가 울돌목을 지나 이신순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전함이 바다로 나가자 왜군의 전함 333척이 에워싸기 시작했고 우리 군사들은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침착하게 군사들을 격려하며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홀로 적진에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니 처음에 겁을 먹었던 군사들도 시간이 지나자 이순신의 용감한 행동에 기운을 얻어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왜군 함대 사령관인 마다시가 죽어 물어 떠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순신은 마다시의 목을 베서 돛대 위에 달았으며 마다시의 목이 매달린 것을 보는 순간 왜군들의 사기는 크게 꺾였습니다.

이렇게 왜군들은 대장선을 비롯해 31척의 배가 한꺼번에 부서지자 두려움에 떨며 도망을 쳤고, 그중에서 100여 척은 도망가다 이순신이 울돌목에 미리 준비해 둔 수중 쇠사슬에 걸려 부서지고 뒤집어졌습니다.

우리 군사의 30배 가까운 전함을 이끌고 온 왜군은 무참히 패하고 돌아갔으며 칠천량에서 우리 수군이 전멸한 지 두 달만에 거진 승리였습니다.


1597년 10월 29일 ( 53세 ) : 고하도에 진지를 둠.

 

1598년 2월 17일 ( 54세 ) : 수군 진지를 고금도로 옮김.

1598년 7월 16일 ( 54세 ) : 명나라 수군의 장수 진린과 연합 함대를 만듦.

1598년 11월 19일 ( 54세 ) : 노량 · 관음포 해전에서 전사함.

 


1643년 :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음.

이충무공 동상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사거리에는 이순신 동상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1968년 4월 27일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약 7m입니다.

 

 

1706년 : 충청도 유생들의 건의로 아산 현충사를 세움.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이 살던 충청남도 아산에 세운 사당입니다. 이순신이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난 1704년 충청도의 선비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자고 조정에 상소를 넣었으며 2년 뒤인 1706년 숙종의 허락을 받아 사당을 세웠습니다.

 

 

1795년 : 유득공이 교서관에서 이충무공 전서를 펴냄.

이충무공 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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